패티김과 이혼한 길옥윤 딸 최정아는 누구길래? 정한용, 동생 최치갑 찾아…“패티김♥길옥윤 애정행각 목격” 혜은이 리즈시절 과거 ‘서울가요제’ 로 단숨에 신인서 가수왕. 재혼 전연란

배우 정한용이 작곡가 고(故) 길옥윤의 동생 최치갑 씨와 50년 만에 재회하면서 길옥윤에 대한 관심이 쏠리고 있다.길옥윤은 1927년 평북 영변 출신이고 길옥윤은 1995년 별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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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특히 패티김, 혜은이, 현인, 장혜리 등 당시 쟁쟁한 가수들의 많은 히트곡들을 써 주었다. 특이하게 마셜 제도의 국가도 작곡한 이력이 있다. 패티김과 결혼했으나 6년만에 이혼했으며 슬하에 딸이 있는데 패티김이 키웠다. 이후 28년 연하의 전연란과 재혼하였다.

배우 정한용이 초등생시절 자신을 따듯하게 대해준 작곡가 고(故) 길옥윤(최치정)의 동생 최치갑을 찾아 나섰다. ​정한용은 15일 방송한 KBS1 교양프로그램 ‘TV는 사랑을 싣고’에 출연해 최치갑을 찾고 싶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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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용은 약 50년 전 초등학생이었을 당시 최치갑과 그의 맘이­가 자신의 집에 세 들어 살았다고 설명했다. 최치갑은 작곡가이자 색소핸펀 연주가로 유명한 길옥윤의 동생이다. ​정한용은 형이 없던 자신에게 최치갑이 따듯하게 대해줬다면서 “한 가족처럼 나누며 살았다”고 말했다. ​정한용은 길옥윤과 패티김의 애정행각을 목격했다고도 했다. 길옥윤과 패티김은 1966년 결혼했지만 1972년 이혼했다.

정한용은 “패티김 씨가 길옥윤 씨의 무릎에 앉아있더라”며 “큰 아줌마가 날씬한 아저씨 위에 앉아 있었던 기억이 난다”고 말했다. ​정한용은 최치갑을 서울대 치대생으로 기억했다. 1960대 초반 학번이었고, 부산에서 치과를 개업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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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팝의사건·사고 (40) 1977년의 신데렐라 혜은이 1977년은 문화방송에서 주최한 두 개의 가요제가 ‘테이프 커팅’을 치른 해이다. 특정 방송국에서 주 최한 가요제가 시작되었음을 굳이 언급한 이유는 이들 가요제가 일회성 화제에 머물지 않고 가요계 에 젊은 피를 공급하고 새로운 트렌드를 전파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청(소)년기를 보낸 이 른바 70·80세대라면 ‘엠비시 대학가요제’가 그해 9월 처음 열렸다는 사실은 상식이다. 그렇다면 문화방송에서 주최한 또 하나의 가요제는 무엇일까. ‘엠비시 대학가요제’보다 4개월 앞서 열린 ‘서울가요제’다. 이듬해부터 ‘서울국제가요제’로 변경된 뒤 10여 년간 이어지며 인상적인 무대 를 여럿 남긴 가요제다.

특히 1979년 윤복희가 부른 ‘이츠 유(여러분)’가 그랑프리로 호명되자 윤항 기·윤복희 남매가 감격에 겨워 눈물을 훔치던 모습은 현재 30대 중반 이상의 연배라면 잊지 못할 장 면일 것이다. 물론 기억 속 화면은 컬러가 아니라 흑백일 테고. 마찬가지로 1977년 열린 ‘1회 서울가요제’도 어제 일처럼 생생한 기억을 남긴 행사로 간주된다. ​진미령이 ‘소녀와 가 로등’을 부를 때 작곡가인 10대 여고생(요절 장덕!)이 악단을 지휘하던 모습은 1년 뒤 ‘제2회 엠비시 대학가요 제’에서 20대 초반의여대생(심수봉!)이 피아노를 치며 트로트 ‘그때 그 사람’을 부르던 모습만큼이나 이채로운 그림을 남겼다. 하지만 무엇보다 하이라이트는 혜은이의 ‘당신만을 사랑해’(고 길옥윤 작사·작곡)의 그랑프리 수상과 앵콜 무대 였다.

앳된 용모의 혜은이가 뛸 듯이 기뻐하고 머리에 하얗게 서리 내린 길옥윤도 혜은이와 스스럼없는 장면을 연출하 던 모습 그리고 노래하는 혜은이 옆에서 길옥윤이 감미롭게 색소핸드핸­펀을 연주하던 모습 말이다. ‘제1회 서울가요제’ 당시 혜은이는 엄밀히 말해 신인은 아니었다. 이미 ‘당 신은 모르실 거야’(길옥윤 작사·작곡)로 데뷔한 상태. 하지만 신인 티를 미 처 벗지 못한 상태에서 참가한 ‘서울가요제’에서 대상을 받은 걸 기점으로 가요계의 정상 자리에 단숨에 등극했다. 패티 김과의 결별 이후 6년여만 에 제대로 된 여가수 파트너를 맞이한 길옥윤 역시 패티 김과의 콤비 시절 이 부럽지 않을 만큼 정상의 작곡가 지위를 탈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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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은이 길옥윤 콤비 에게 1977년은 고층엘리베이터를 타고 스카이라운지로 직행하는 것과 비슷했다. ‘진짜 진짜 좋아해’ ‘뛰뛰빵빵’ ‘감수광’이 히트한 것도 그 무렵이 었다. 그 결과 1977년의 신데렐라로 혜은이를 뽑는 데 이견의 여지가 없었다. 나아가 1977년은 혜은이의 해라고 불러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는 ‘77 방송가요 대상’과 ‘77 엠비시 10대 가수 가수왕’을 거머쥐었고, 현해탄 건너 ‘ 세계가요제’에 참가하는 등 해외 국제가요제 ‘국가대표’ 가수군의 일원으로 도약했다.

이후에도 5년 연속으로 10대 가수에 선정되는 등 혜은이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훵키(funky)한 리듬의 ‘제3한강 교’와 ‘새벽비’를 동반히트시키며 디스코 열풍의 한 축을 이뤘던 1979년은 혜은이에게 있어 ‘어게인 1977’나 다름없었 다. 이 곡들의 히트를 전후해 이은하의 ‘밤차’와 ‘아리송해’, 윤시내의 ‘공연히’와 ‘난 모르겠네’ 등 훵키한 리듬감과 손가 락으로 허공을 찌르는 춤을 곁들인 여가수의 노래가 유행한 사실은 뒤에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혜은이는 길옥윤의 전 파트너 패티 김처럼 허스키한 음색에 성량을 뽐내는 팝 계열 대형 가수 스타일도 아니었고 이미 자처럼 비감 어린 가창을 완벽할 정도로 제어하는 트로트 가수 스타일도 아니었다. 성량은 작았고 가창력은 완성되지 않았지만 자그마한 체구에 까만 눈망울과 깜찍한 인상만큼이나 맑고 단아한 목소리의 호소력은 그런 점들을 부차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이용우/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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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년대 말로 기억한다. 늘 좋은 음악을 조달해주는 후배가 비디오테이프를 한 장 보내왔다. 제목은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 아프로 쿠반(Afro-Cuban) 재즈를 세계에 알린 다큐멘터리다. 먹고사는 일이 바빠 그땐 이런 음반이 나왔는지, 누가 기획했는지도 몰랐다. 전화로 ‘굉장하다’는 이야기만 듣고 테이프를 틀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놀라운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세계에 감동 던진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원래 이 음반과 공연을 기획한 사람은 기타리스트 라이 쿠더(Ry Cooder)다. 음악팬들에게도 다소 생소한 이름이지만, 매력적인 스틸 기타리스트로 본토에서는 꽤 유명한 이다. 80년대 초 음악매거진 <롤링 스톤(Rolling Stone)>에서도 그를 조명한 글을 본 적이 있다.

다큐멘터리 감독은 영화 ‘ 텍사스’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빔 벤더스다. 두 사람이 어떻게 의기투합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50년대를 열광시켰던 옛 쿠바음악을 발굴하고, 또 아직 죽지 않고 있던 늙은 명인들을 불러 모으는 과정이 참 감동적이었다.​한국판 소셜클럽 ‘브라보 재즈 라이프’​3년 전 한국에서도 이를 모방한 작품이 나왔다. 이름하여 ‘브라보 재즈 라이프’. 팬들에게 생소한 한국 재즈 1세대를 ‘부에나 비스타’를 본뜬 형식으로 만든 다큐멘터리다. 해설 글이나 연주 동영상을 본 적은 있는데, 다큐 전체를 온전히 감상하지는 못했다. 그러다 우연히 독립영화 채널에서 이 다큐를 상영하는 걸 보고 비로소 전체 줄거리를 파악할 수 있었다.​예상했던 대로 작품성과 예술성이 뛰어난 다큐는 아니었다. ‘부에나 비스타 소셜클럽’을 원용했지만 그에 상응하는 격을 구현하진 못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재즈 1세대가 걸어온 신산한 과정을 비교적 충실하고 담고 있었기에 색다른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다큐에 등장하는 타악기 연주자 류복성 씨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는 술자리에서 후배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봉고 치는 일이 알려져 TV 묘기 대행진에 출연했다”며 “봉고 연주가 무슨 묘기라고!” 재즈가 대중들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을 때다. 그가 겪은 황당함은 지금 들어도 황당하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재즈 외길을 걸어온 그에게 후배들이 “이젠 거장”이라고 말하자 곧장 이를 되받아친다. “거장은 무슨 거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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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고 들고 묘기 대행진 나간 1세대​같이 폭소를 터뜨렸지만 마음은 짠했다. 어떻게 저런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수십 년을 버틸 수 있었을까? 백발이 성성한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증언한다. 음악에 대한 열정 때문이라고. 재즈가 지닌 매력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었다고.​연주곡 중에는 중견 피아니스트 임인건 씨가 연주하는 ‘강선생 블루스’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원로 트럼페터 강대관 씨에게 바치는 곡이었는데, 데이브 브루벡을 연상시키는 피아노 맵시가 너무 좋았다. 사실 다큐에 등장하는 재즈곡은 잘 알려진 스탠더드 곡들이 대부분이다. 색소휴대폰 연주자 강태환 씨가 프리재즈 듀오인 박재천·미연과 공연하는 작품 한 컷을 제외하고는, 거개가 팝 선율과 별반 다를 바 없다.

게다가 하이라이트 공연에서 보컬리스트 김준 씨가 ‘마이 웨이(My Way)’를 부르는 걸 보고는 오금이 저렸다. 재즈가수들도 즐겨 부르는 레퍼토리이긴 하지만 노래방 필수 코스인 ‘마이 웨이’를 저런 공연에서 내세우다니! 다소 격이 떨어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그래도 ‘마이 웨이’는 사절​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한국인에게 팝송 ‘마이 웨이’는 특별한(?) 곡이다. 가사에 담긴 의미가 각별한데다 선율이 제법 무게가 있다 보니, 우수마발이 짧은 혀로 이 노래를 부르곤 한다. 음악을 사랑하는 친구는 그래서 내게 늘 충고한다. “제발 노래방에서 ‘마이 웨이’ 좀 부르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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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염려하는 것은 아마 이런 것이리라! 영어가사에 담긴 기름기-노래 자체가 원래 느끼하다-그리고 그걸 뒷받침하는 마초이즘 등등. 아마 한국 중년 남성의 현시욕이 가장 잘 발현된 노래가 바로 ‘마이 웨이’가 아닌가 싶다.​그래서 설령 이런 노래를 부르더라도 재즈 창법을 동원하면 좋으련만 반주만 재즈 형식일 뿐 김준 씨가 부르는 노래는 그저 원곡 그대로다. 옥에 티는 이런 걸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재즈 보컬은 팝 보컬과 좀 달라야 하는 것 아닌가?​물론 그런 사소한 찌푸림이 있다고 해서 다큐가 지닌 미덕이 훼손되는 건 아니다. 전체적으로는 재즈 1세대의 진솔한 모습과, 그런 파이오니어에 대해 예의를 갖추는 후배 음악인들이 어울리는 장면이 참 보기 좋았다. 역시 어느 분야를 막론하고 사람들이 이루는 성취는 ‘역사를 통해 쌓이는 누적치(累積値)’라는 옛말이 틀리지 않음을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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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크-듀크를 만나다​재즈 1세대를 이야기할 때 빠트릴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드러머 최세진 씨다. 그는 홍콩에서 오래 활동했는데 <재즈 피플>은 최근호에서 그가 당시 재즈 레전드인 피아니스트 텔로니어스 몽크와 협연했음을 사진으로 보여준다. 당시는 이런 경험이 무척 드물었을 텐데, 재즈인들 입장에서 보면 기연(奇緣)이라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으리라! 김준 씨도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 밴드 내한공연 때 마이크를 들고 무대에 올랐을 때가 일생 중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라고 회고하는데 이 말에 깊이 공감한다.

여하튼 다큐 제작 이후 재즈 1세대들이 활발한 연주활동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낸 것은 이 영화가 거둔 가장 큰 수확이라고 생각한다.미국을 비롯한 재즈 본토를 찾아가는 유학 물결이 80년대부터 본격 시작되면서 한국 재즈는 중흥기를 맞이한다. 지금 재즈 신에서 한 가닥 한다하는 뮤지션들은 죄다 유학파들이다. 이들은 딴따라라는 비아냥을 듣고 자란 세대가 아니다. 재즈가 예술장르로 대접받는 시기에 개화(開花)한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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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밭길을 배워라!그래서 그런지 테크닉도 좋고, 음악에서도 세련미가 넘쳐난다. 그런데 아쉬운 건 1세대 같은 헝그리 정신이 없어서 그럴까? 색깔 없는 온실음악이 많다. 보기도 좋고 듣기도 좋은데 말랑말랑하기만 할 뿐 폐부를 찌르는 감동이 없다. 재즈인들이 한국 재즈 1세대에게서 배워야 할 것은 그들이 걸어온 가시밭길이 아닐까? 이빨이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트럼펫을 놓지 않겠다는 강대관 씨를, 영어 스탠더드를 죄다 우리말로 옮기겠다는 작곡가 이판근 씨를 닮아야 하는 건 아닐까? [구주모의 재즈에세이] (21) ‘브라보 재즈 라이프’를 보고서​

본명 최치정생몰년도 1927년 2월 22일 ~ 1995년 3월 17일(향년 68세)출생지 평안북도 영변군​학력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현재의 서울대학교 치의학대학원)평안북도 영변보통학교 졸업평안남도 평양고등보통학교 졸업서울대학교 치의과대학 치의학사경희대학교 치의과대학원 치의학 석사​가족 배우자 패티김(1966 ~ 1973)데뷔 1962년 현인 <내 사랑아>종교 무종교 → 천주교(세례명: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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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나온 해인 1949년 이후에도 계속 미8군 무대에서 재즈 색소포니스트로 활동하던 그는 한국 전쟁으로 전란 중이던 1951년에 대한민국 육군 중위로 임관하여 1953년까지 한국 전쟁에 군의관으로 참전하였고 1953년에 육군 대위 진급, 이듬해 1954년 대한민국 육군 대위 예편하였으며 이후로도 재즈 색소포니스트 활약을 계속하였다.